[리뷰] 89 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

2001저자 경제학자로 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며 낙숫물 효과를 외치는 다른 경제학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시장을 부정하고 정부의 무조건 개입만 주장하는 쪽도 아니다. 시장을 시장답게,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토지제도를 정의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현재 대구가톨릭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02 머리말 책에서 다루려는 경제 문제, 특히 부동산 문제로 논의해 보자. 사실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그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돼 왔다. 이런 사회적 통증을 유발하는 질병의 정체는 사람을 투기로 몰아넣는 특수한 초과이익, 즉 불로소득이다. #03 내용17 소수의 지주층은 불로소득으로 호사를 하고, 나아가 대중은 노력소득조차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경우 어느 순간 사회의 근저에서 강한 힘이 분출돼 그 사회를 전복시킨다. 고대 그리스 사회가 몰락한 것은 대토지 소유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이나, 고려왕조가 붕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8, 식민지 조선에서 대지주 계층은 1910년대의 토지조사 사업, 1920년대의 산미증식 계획과 같은 지주 중심의 농업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해 1930년대 이후 노골적인 지주중심적 농정이 한 발 후퇴한 뒤에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농민들이 보릿고개에 풀 뿌리와 나무 껍질을 먹으면서 연명할 정도로 빈곤에 시달리던 근본 원인은 식민지의 지주제가 강화 유지됐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자 식민지 지주제를 해제하고 경작할 땅을 나눠 달라는 요구가 농민들에게 일었다. 유상 몰수, 유상 분배 방식이긴 했지만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엄청난 개혁이 성공했다는 것은 당시 농민들의 요구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입증한다. 19해방 직후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경제적 쟁점은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처리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농지 중 모든 소작지와 3정보(1정보는 3,000평) 이상의 소유지를 몰수해 해당 농지의 소작농, 영세농, 순국선열유족, 피고용농 등에게 분배했다. 물론 대가 상환과 지주 보상이 이어졌다. 그 결과 1945년 말 35%에 불과했던 자작지 비율이 1951년 96%까지 급증했다. 그 결과 1960년경 한국의 지니계수는 0.3을 약간 웃돌았고 분석 대상 26개국 가운데 토지분배가 최고로 평등했다. 23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에서 평등한 지권을 실현한 일대 사건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대지주가 지배하던 극도로 불평등한 나라를 단숨에 그저 그런 소농민이 대부분인 평등한 나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자발적 노동, 창의력, 그리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저축열과 교육열이야말로 한국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5
1652;정한 힘이었다. 그러나 도시 토지와 임야를 개혁 대상에서 제외하고 토지 소유 불평등의 재현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24한국사회에서 토지를 일반상품처럼 여기는 토지사유제는 16세기라니 500여 년이 지난 셈이다. 그러나 절대적 배타적 권리로 법인이 된 것은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 토지사유제가 법률의 보호를 받는 공식제도로 확립된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뒤 곧바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토지제도는 국전제라며 이념적으로 왕토사상에 기반을 두었다.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였고, 백성은 국전을 빌려 경작하는 존재였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왕족과 관료들에게 조세징수권이 붙은 사전이 지급됐다. 이것은 “과전”이라고 불렸다. 28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전역에 대해 소유권 조사, 땅값 조사, 지형 및 지모 조사를 실시했다. 토지 전체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면 지세 확보도 쉬워진다. 일본은 땅값조사로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안정적인 재정수입원을 확보하고, 이른바 근대적인 토지제도를 도입해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토지재산을 소유할 때 따르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제거했다. 조선인 지주 역시 일물일권적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 국내에 비해 낮은 토지세율을 적용받는 혜택을 누렸다. 30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지 지배의 근간을 닦은 뒤 1920년부터 대대적인 농업개발정책을 추진했다. 신맛 증식 계획으로 명명된 이 농업정책은 조선에서 쌀을 대량으로 증산해 일본에 들여오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일본인 지주들은 러일전쟁 이후 땅을 사들여 농업경영을 하려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광대한 저습지와 상습 침수지를 싼값에 다량 매입한 뒤 수리시설을 설치해 비옥한 농지로 개선하는 방식으로 농장을 개척했다. 33 식민지 지주제의 발달 뒤에는 조선인 농민의 몰락과 빈곤이 있었다. 농지를 잃고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자작농과 자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했다는 것은 조선농민들이 자기 땅을 잃고 몰락했음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의 농부들은 보통 수확량의 절반을 지주에게 지대에 바쳐야 했다. 38 미국과 이승만에 의해 해방을 맞이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유상매수, 유상분배방식이 이루어졌다. 농지 매입과 분배는 성공적으로 진행됐지만 농민의 땅값 상환과 땅 주인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농민들의 땅값 상환이 부진한 탓도 있지만 정부가 군사비 지출과 인플레이션 방지를 위해 보상금 지급을 의도적으로 늦췄기 때문이다. 46농지 개혁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많은 농민은 1950년대에는 수확량의 상당 부분을 임시 토지수득세로 납부해야 했지만 과거 소작농 시절에 비하면 &#4
4221;제적 수준이 높아져 수중에 농업잉여를 남길 수도 있었다. 열심히 일할수록 농업잉여가 늘어나기 때문에 밤낮없이 일하고 수확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농업 잉여를 생활비에 쓰지 않고 자녀 교육 투자에 썼다. 농지개혁이 한국인의 교육열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이다. 48 농지 개혁은 신흥 자본가 계층이 출현하는데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농지개혁은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다는 목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지주계급은 산업자본가로 변신하지 못해 거의 몰락했다. 분배농지의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이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그런데 일본인이 남긴 귀속 사업체의 매입대금을 지가증권으로 납입하는 것이 인정되자 증시에서 싼값에 지가증권을 사들인 사람들이 대거 사업체를 사들여 신흥 자본가 계층으로 등장했다. 이들이 실제 귀속된 기업을 인수할 때 지불한 가격은 시가의 1/10에 불과했다. 매매가 자체가 낮아 싼값에 사들인 땅값 증권을 매입대금 납입 때 액면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62조봉암은 농지 개혁으로 한국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1391년 정도전이 과전법 개혁으로 이룩한 평등지권사회를 550여 년 만에 다시 실현했으니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졌다는 정도로는 칭찬이 부족할 수 있다. 77 강남개발은 한강 연안 공유수면매립사업과 함께 강남을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만들면서 땅값 폭등을 불러왔다. 1960년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이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강남 개발은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미 강북지역의 택지는 거의 개발되지 않아 주택과 도시기반시설은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엔 한계를 드러냈다. 또한 휴전선에서 불과 40km 떨어진 강북에 인구와 시설이 더욱 밀집되는 것을 박정희는 원치 않았다. 최적의 대안은 1963년 서울에 편입됐지만 미개발 상태인 강남지역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79 박정희 정권이 강남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제3한강 다리(한남 대교)의 건립과 경부 고속 도로 건설이 계기였다. 1966년 착공해 1969년 제3한강교는 준공됐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해 1970년 준공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강남 개발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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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영동지구획 정리사업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재원이 부족했던 박정희 정권이 동원한 고육책 성격이 짙다. 영동은 오늘날의 강남을 가리킨다. 박정희 정권은 경부고속도로 기점인 제3한강교 남단에서 양재동에 이르는 구간의 도로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바로 구획정리 방식을 활용했다.당초 영동지구획정리사업은 도시개발 자체가 아니&#4697
2; 도로부지 확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구획정리에 필요한 면밀한 계획과 설계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었다. 경부고속도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한 곳은 영동1지구였다. 그러나 영동1지구와는 별도로 다른 구획 정리 사업이 강남에서 추진됐다. 새로운 구획정리지구는 영동2지구로 불렸다. 8570년대 초 세계경제 불황의 여파가 닥치자 1970년대 중반까지 강남지역에서 주택건설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주거이동도 매우 부진해 계획상 유치인구 목표인 70만 명의 10%에도 못 미쳤다. 85개 사업 이외의 목적으로 시작된 강남개발사업이 명실상부한 도시개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영동지구와 잠실지구의 토지구획 정리가 상당히 진행되면서 시가지의 틀이 잡혔고 정부가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파격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1972년 잠실대교, 1973년 영동대교, 1976년 잠수교와 천호대교, 1978년 남산3호터널, 1979년 성수대교가 속속 준공되면서 도심 접근과 교통조건이 크게 개선된 것도 중요한 변수였다. 86 강남에서 아파트 단지 건설이 시작된 것은 한강변에 공유수면 매립 붐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 바다나 강처럼 지상에 물이 차 있을 때 법률 용어로는 그것을 공유수면이라고 부른다. 공유수면은 모두 국유지이지만 바다 일부를 막거나 하천에 제방을 쌓아 흙으로 메우면 사유지로 전환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은 한강변 공유수면 매립의 전성기였다. 동부이촌동, 반포, 흑석동, 서빙고동, 압구정동, 구의동, 잠실 등의 지역이 공유수면매립사업으로 개발되었다. 87 한강 연안의 공유수면매립사업은 참으로 비리의 복마전이었다. 매립면허만 따면 제방과 도로용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이 통째로 공기업 수중에 떨어지고, 조성한 땅은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으로부터 일괄 매입하거나 공기업 자신이 아파트단지로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대한 이권이 걸린 이 사업이 국내 굴지의 건설사는 물론 공기업인 수자원개발공사, 종교단체, 고위 장성 출신까지 벌 떼에까지 달려들었다. 89공유수면매립지구는 그 자체가 집단택지였기 때문에 그곳에 아파트단지를 짓기는 쉽지 않았다. 경인개발이 매립한 반포지구는 대한주택공사가 일괄 매입해 1974년 강남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반포아파트 대단지를 건설했고 현대건설이 매립한 압구정지구에는 1975~1977년 사이에 현대건설이 직접 현대아파트 단지를 건설했다. 당초 23동 1,562가구였던 현대아파트 단지는 이후 확장되어 76동 5,909가구의 거대 단지로 발전했다. 동부이촌동은 강남은 아니지만 수자원개발공사가 일찌감치 공유수면을 매립한 뒤 19681969년 공무원 아파트 단지, 1970년 한강 아파트 단지와 외국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강남의 아파트 단지 건설 붐을 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