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알려지지 않은 아이의 죽음, 은유, 이것은 서평을 가장한 나의 사회비평문 (사회비평문 예)

 고3 2학기 1학기 1권을 읽는 책으로 ‘모르는 아이의 죽음’을 읽는다. 읽고 사회 비평문을 써 보는 활동을 하는데 학생들에게 예로 제시하는 비평문을 써 보았다. 이건 서평을 가장한 나의 학습 자료.

지금 내가 빠져 있는 수업 활동은 「교사의 모범」이다. 학습지에도 어떤 형식으로 답을 써야 하는지 예시 답안을 쓰기도 하고 학생들이 해야 할 활동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내가 쓴 사회비평문을 학생들에게 예시로 제시하려고 써 봤어. 「몹시 부끄럽다. 사실 제일 좋은 예는 학생들의 작품이지만 처음 계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의 예가 없다면 가능한 한 샘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모든 활동을 내가 미리 할 수는 없지만 예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활동의 질이 달라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또활동을하기전에”나도미리해봤어.”라고하면수업할때힘이생긴다.

1챕터 정도의 법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인터뷰 사례가 주를 이루고 있어 중하위권 고교생들도 자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1부는 김동준 가족의 인터뷰, 2부는 산업재해 사례와 특성화고 학생들의 인터뷰를 실었다.거기 사람이 있다.

내가 인문계 고교에 다닐 때 버스 정류장에 공고 친구들이 서 있는데 보기에도 쭈그리고 앉았다. 그들은 욕한 것도 아니고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항상 가까이 서 있었다. 내가 저런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나가는 사람을 괴롭히는 거 아냐? 옷깃을 여미며 자신의 출신 성분을 알려주는 교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발령 4년째인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중학교 성적이 가장 낮은 학생들이 오는 전문계 고교에서 근무했다. 농업과 공업을 하나로 묶은 곳이었다. 중학교에서 다른 지역 고교로 전출을 희망했지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전문계 학교에 배정됐다. 인문계 교과 선생님들에게 전문계 고교는 가르치는 재미도 없고 아이들도 힘든 곳이어서 금방 학교에 빈자리가 생긴다. 학생 때 마음속으로 배제됐던 아이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위험도 주지 않았지만 상상만 해도 잠자리에 들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생님으로서의 사명감을 다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지냈다.

윤 선생님, 힘들다고 1년 뒤 바로 인문계로 옮기지 말고 3년만 신으세요. 그래야 배울 게 있다 내가 좋아한다는 선배 국어교사의 말을 믿고 그야말로 3년을 버텼다. 생각보다 내가 마주한 현실은 처참했다. 담임한 아이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 오고, 하루 종일 학교에 나갔다. 성주(가명)야, 왜 아직 학교에 안 왔어? 방금 일어났어? 엄마 연서(가명)가 점심 먹고 학교 나갔어요. 전화로 시작해서 전화로 끝나는 하루였다. 자기소개서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고 학생 때 하면 큰일 날 줄 알았던 술과 담배는 일상이었다.

내가 있던 전문계 고교에선 고3 담임경쟁이 치열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은 2년도 못 버티고 자퇴했고 가난한 아이들이 3학년이 되면서 생활지도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또 2학기에는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빈 교실이 되기 때문이다. 3학년은 취업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전문계 교과에서 대부분 담임을 맡았기 때문에 국가 영어 수선생님들은 주로 1, 2학년 담임을 맡았다. 모르는 아이의 죽음에 나오는 장윤호 선생님처럼 학생들이 취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교사들은 며칠 동안 회사를 방문하며 학교와 현장을 조목조목 짰다. 돌아오는 선생님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이 별로 없다, 가도 힘들다고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 푸념했다. 공사 자녀들이 가장 잘했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은 삼성 하청공장이었다. 취업의 최전선에서 지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취업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2007년 고 황유미 씨 사건으로 삼성의 산재가 도마에 올랐을 때였다. 속으로는 저리 가라고 해도 되나?라고 생각했지만 연봉과 파란 이름의 아이들은 기쁨의 손길을 흔들며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평생학교 졸업장은 국민학교 졸업장이 유일한 어머니가 맞벌이를 시작할 때 받을 수 있는 곳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최저시급 개념도 없을 때 식당 심부름, 식용유 납품공장, 아파트 청소노동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일했다. 지금은 부모님 학력조사를 하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는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조사를 했다. 어머니는 「부끄러우니 중졸에게 손을 들어」라고 부탁했다. 담임선생님이 엄마, 중학교 졸업하신 분이야?라고 물었을 때 누가 집에 와서 졸업장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닌데 손을 들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각의 공포보다는 어머니를 더 떳떳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많은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어머니는 나와 동생이 정규직을 얻자 친척들에게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칭찬을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죽든 살든 내 자식만 거기 없으면 된다. 나에게나 부모님 모두에게 정규직은 투입한 노력에 대한 정당한 결과였다. ‘그렇게 힘들면 너희들도 노력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가진 자의 자리에서 더 많이 잡으려고 했다.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인 k-방역, k-컬쳐에 대해서는 떠들썩하게 얘기하면서 왜 k-노동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가. 우리가 지금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K-부심이 모르는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닐까. 내가 착한 어른이라고 해서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고는 할 수 없다. 아직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나는 모순과 편견 덩어리다.